꼬불꼬불 비탈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삿갓봉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는 아담하게
자리한 온천이 하나 있다. 강원도와 경기도를 더 빨리 연결하기 위해 가로 막은 산
에 터널을 두 개 뚫고 닦아 널따란 포장도로를 내기 전에는 제법 많은 차들이 달렸
을 이 한적한 산길에 늦가을 가랑비가 뿌린다. 며칠 전만 해도 화려한 단풍 색들로
덮여 있던 산에는 바스락거리며 마르기 시작한 낙엽이 젖어간다. 가시범불 속에서
부지런히 먹이를 찾던 참새떼가 한참 만에 지나는 차 소리에 놀랐는지 푸드덕대며
날아올라 다른 가시덤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 새들도 겨울을 나려고 먹이를 비축하
는 걸까? 흑백사진처럼 빛을 잃은 기억 속에는 뒷마당에 펼쳐진 대나무 숲으로 그
물을 걸어두고 저녁녘에 열 댓 마리씩 떼어낸 다음 장작 아궁이에서 막 구워낸 참
새구이와 슬레트 지붕을 타고 내려오다 줄줄이 매달린 고드름이 따스한 늦은 아침
햇살 속에 똑똑 녹아내리던 계절이 들어있다.
주말이면 제법 등산과 더불어 온천까지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모두 일
터로 자리한 평일 날 오후는 정말 한가하다. 주차를 하고 카운터에 들르니 의자 등
받이를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테이블에 올려 둔 채 코를 골던 아저씨가 선잠이 들
었었는지 벌떡 일어난다.
칠천원. 입욕표를 받아들고 이층으로 오른다. 일층에는 여탕. 아직 들여다 본 적 없
는 신비한 공간이다. 역시나 졸고 있는 이발사 겸 지배인 아저씨를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지나치고 항상 이용하는 캐비넷에 옷을 벗어 둔 뒤 열쇠를 뽑아 왼 발목에
채운다. 넓은 공간에 보이는 이는 겨우 두 명. 간단히 비누칠을 하고 유난히 많이
일어나는 거품을 죄다 씻어낸 뒤 적당히 데워놓은 탕 안에 몸을 담근다. 숨을 길게
들어 마셔 허파에 바람을 가득 채운 다음 드러누우면 몸이 둥둥 뜨고 한참을 떠다
니다 천장에서 무거워져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눈을 한 대 얻어맞아 깜짝 놀래
몸을 일으키고 황토를 개어 벽을 두껍게 칠한 사우나로 향한다. 어제 부어댄 술이
땀으로 줄줄 흘러내려 참나무 바닥을 적신다. 술좀 끊자 끊어. 에구 죽겠다. 꼬맹이
들에겐 풀장과도 같은 크기의 냉탕에는 충분히 몸을 식힌 다음 들어선다. 홀딱 벗
은 채로 시체로 변해 실려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사우나 세 번, 냉탕 세
번. 이러면 일상의 피로는 모두 버린 셈이다.
아직 세시 반. 약속된 시간까지 삼십분의 여유다. 모처럼 신선한 산공기에 취해보려
노천탕으로 이어지는 문을 연다. 아담한 정원 속에 하늘색 타일을 바른 산속 연못
이다. 누가 들여다 볼까 싶어 주변을 소나무를 둘러 옮겨 심어놓았다. 혼자 들기
버거운 크기의 화강암들로 흙을 막아 만든 화단엔 울긋불긋 가을색을 자랑하는 철
쭉들로 채웠다. 빗물이 데워 둔 탕을 식히지 못하게 하려고 천막을 높이 드려두고
구름 걷힌 날엔 그늘을 만든다. 가랑비가 천막에 부딪치는 소리가 지나던 길목 포
장마차에서 닭똥집과 고갈비로 소주잔을 비워내던 학생시절로 데려간다. 어느 교수
님이 그랬다. 포장마차에서 천막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릴 안주 삼으면 오르가즘을
느낀대나? 참으로 희한한 성적 취향이다.
안에서 보지 못한 세 명의 중년 신사들이 이곳에 모여 들어 앉아 잡담을 풀어댄다.
속알머리, 흰머리, 검은머리가 주고받는 말투로 봐선 모두 친구인 듯 한데 각자 먹
은 나이는 좀 차이나 보인다. 어릴 때는 나이 들어 보이고 싶었지만 이제 전혀 아
니다. 서른다섯이라고 하면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대화는 속알머리가 이끌어 가는
듯. 대선 이야기다. 문씨, 안씨, 그리고 박씨. 정치 따위에 관심 끊어버린 지 오래지
만 이들을 통해 민심을 확인해 본다. 아무래도 속알머리 아저씨, 박씨를 제 애비와
혼동한 듯하다. 이 만큼 잘 살게 된 건 박씨 때문이란다. 원칙과 절차 따지다 보면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논리에는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틈 조차 보이지 않는다.
‘젠장, 아저씨! 우리 딸은 지 애비 하나도 안 닮았다구요....’ 삼킨다.
누가 되도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정직한 사람이면 좋겠다. 상식선에서 법을 만들고
해석하는 누구나 납득할 만큼 투명한 정치는 어쩌면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생일날에나 구경할까 말까 싶었던 케이크를 자르던 손이 유난히 작아 보이
던 조각을 내게 건네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제론 모두 같은 크기의 케이크 조
각을 들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몸을 닦고 스킨만 약간 따라내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에 바른 뒤 이제는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 내려오고 반듯이 곧게 뻗은 자동차전용도로에 차를 올려 달리다 터널
두 개를 지난다. 어느새 활짝 개인 산허리로 무지개가 길게 뻗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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