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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2016년 12월 9일(234567)

참 외우기도 쉽게 재미있는 숫자가 나왔다. 찬성 234 반대 56 무효 7.


대한민국 최초 여성대통령을 탄핵한 20대 국회의원들이다. 주목할 만 한 건 대통령의 소속 여당에서

과반이 넘는 표가 쏟아졌다는 것.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주변에 잔뜩 쏟아놓은 추측성 비방을 사실로 받아들여

나름의 애국심에 이끌린 사람들이 주말이면 광화문을 채운 2016년의 늦가을은 촛불로 가득했다.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희망하기에 그런 열정이 표출되었으리라.

물리적 폭력을 배재하고 최대한의 표현의 자유를 이용한 시위와 역시 최소한의 공권력의 행사로 대응한 정부를

바라보는 관점들이 충돌하는 곳은 SNS라는 21세기가 탄생시킨 새로운 공간이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밀려오는 공산주의에 맞서 수많은 희생으로 탄생시킨

대한민국건국의 주역들을 친일 내지는 친미주의자로 낙인을 찍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사람들의 분노는

결코 우리 모두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

따로 분리된 우리로부터 의식화된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고향은

1919년의 1960년의 1980년의 단지 혁명의 불꽃이 막 피기 시작하는 공간일 뿐이다.

그 얼마나 숭고한가. 다수의 불의 앞에 인간으로서 두려움을 떨치고 저항한다는 것은.


세월호의 어린 영혼들에게 참배를 할 권리는 결코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다고 믿는 듯 여전히 그 책임을 적시해 놓았다.

 

우리는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며 외친다.

불행하게 부모를 잃고 형제와도 거리를 둔 채로 살아가는 한 여성에게 40여년 정을 나누며 살아온 인물이 존재함을.

그 지인의 자손들이 누려왔던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없는 부정한 방법에 의해서였고,

우리는 그 부정한 방법의 구체적인 인과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법치주의란 부패한 기득권이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구도를 고착화시키기 위해 도입한 궤변일 뿐이며,

헌법은 언제든지 광장에 모인 다수의 열망으로 그 가치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것이고,

대의제는 조직화된 민중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것이 바로 2016129일 우리가 이룩한 혁명이다.

 

1210일 새벽, 며칠 심하게 앓던 위장병이 차도를 보였다.

책상에 앉아서 들여다보는 세상은 별다른 동요가 읽히지 않는다.

12년 전의 그 날과는 분명히 분위기가 다름은 진행 중인 수사에서 탄핵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여전히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한 통속이 될 수밖에 없는 9명의 재벌 총수들이 청문회에 나와 그 혐의를 부인하는 장면,

최초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태블릿 관련 보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SNS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

정치적 배신자들이 결국 걸어갔던 그 길을 똑똑히 목격했던 사람들이

헌법재판소에게 보내는 믿음 등이 차분한 아침을 맞게 한 듯하다.

 

TV 속에서 광장을 비추는 자들은 여전히 그 경망스러운 입들을 놀려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