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바보상자(Imagine)

마르둑 2012. 12. 2. 23:09

 

요맘 때 어느 겨울, 대나무를 엮어 만든 사다리를 올라 위태롭게 슬레트 지붕을 밟고 계신 낯선 아저씨의 손에는 막 조립을 마친 안테나가 들려 있었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이 생긴 거다! 눈치 없이 이웃집 안방을 차지하고 있던 형아가 자꾸만 ‘너네 집 가라’고 등 떠미는 남의 집 귀한 아들의 팔에 이빨자국을 남기고 씩씩거리며 돌아왔고 그 집 아주머니에게 핀잔을 먹은 어머니의 이야길 전해들은 아버지는 그 길로 곧장 오토바이를 몰아 시내를 향했고 커다란 상자 하나를 실은 채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 돌아오셨다.

 

“잘 나와요?”

“아니 오른쪽, 왼쪽, 좀 더, 좀 더!”

 

어지럽게 끓고있는 브라운관과 지붕을 번갈아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한참을 낑낑거린 다음 철사줄로 완전히 고정시켜 둔 안테나를 뒤로하고 사다리를 내려오신 아저씨는, 근사한 갈색 나무무늬 몸체에 늘씬한 네 다리로 들려 올려지고 양쪽으로 열리는 미세기문 뒤로 회색 브라운관이 숨어있는, 텔레비전의 두 개 손잡이를 번갈아 잡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화면조정까지 마친 후 서둘러 돌아갔다. 흥분에 휩싸인 형제의 눈앞으로 사람이 움직이고 목소리가 들려오자 '만세'를 불렀다. 곧 있으면 ‘프로레슬링’이 나올 거다. 박치기왕 ‘김 일’ 아저씨가 오늘은 ‘일본놈’을 어떻게 박살내 버릴까. 언제나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던 그 분은 우리의 영웅이었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어 안테나가 돌아가면 다시 사다리를 타고 안테나의 위치를 조정해야만 볼 수 있는 흑백 화면에는 일본산 만화영화와 헐리우드산 서부영화, 그리고 당시엔 실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프로레슬링이 들어있었다. 아! 홍수환 아저씨의 화끈한 K.O 장면을 전하는 권투중계도 빼 놓을 수 없겠다.

--엄마! 나 챔피온 먹었어!

 

학교에서 돌아와 서둘러 숙제를 마치고 방송 시작도 하기 전부터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오후 다섯 시를 손꼽아 기다렸다. '화면조종시간' 화면이 사라지고 드디어 '애국가'가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들려오면 내복 바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하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댄 채 자막으로 보이는 '가사'를 경건하게 따라 부르고, 뒤 이어 인형극과 만화영화가 아버지가 회사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를 붙잡아 놓고 넋을 빼 놓았다. 산골 오지 마을에 잡히는 채널이라곤 고작 2개뿐이었지만 얼마나 그 속으로 빠져들었던지, 지나치면 '바보'로 만들어버린다는 어른들의 위협 따위야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고 어머니께선 수시로 그 놈의 '바보상자'를 내다 버린다는 협박을 하곤 하셨지만 정작 이사를 해야 할 때가 되면 부드러운 밍크담요를 둘러 아주 정성스럽게 제일 먼저 챙기는 물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 개울의 얼음이 녹아 흘러가는 소리와 함께 새 학년이 시작되었고, 새로 받은 교과서를 지난해 달력을 찢어 채 싸기도 전에 선생님께선 '가정환경조사'란 걸 하셨다.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들어!"

 

두 겹 껴 신은 양말이 한 쪽씩 구멍 난 곳을 막아주는 언 발로 양초를 문질러 반들반들 미끄러운 마루바닥 위로 빽빽이 놓인 나무의자에 줄을 맞춰 앉아 창밖으로 뻗어간 양철 연통이 뿌연 조개탄 연기를 뿜어대는 교실에서 자랑스럽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던 아련한 기억은 언제부터인가 수치와 분노가 잔잔히 섞인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그 조사는 카세트, 냉장고, 돼지 몇 마리, 소 몇 마리, 심지어 안방에 켜 둔 게 형광등인지 백열등인지 까지 상세히 묻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골마을 살림살이조차 모조리 선생님과 아이들을 통해 알아내려 했던 당시의 '위정자'들에겐 점심시간이면 몰래 교실을 빠져나가 수돗가로 향하던 상처받은 '동심'따위야 하찮은 것이었으리라.

 

#..

 

이미 전 세계 텔레비전 시장을 점령했다는 우리의 '바보상자'는 이제 백 미터 피니쉬 라인을 향해 달려가는 '우샤인 볼트'의 섬세한 종아리 근육 한 가닥을 넘어 유독 말실수가 잦은 어느 아주머니의 오른 뺨에 나 있는 상처자국까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여태 배고픔이라곤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 온 나로써는 솔직히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물질적 풍요가 당시 군복 입은 리더들로 인한 공이 더 큰지 열악한 노동현장을 꿋꿋이 지킨 노동자들의 공이 더 큰지는 자신있게 말할 순 없다. 그저 제한된 경험의 판단에 미루어 다가오는 대선에서 내 양심적 '한 표'를 행사하려 할 뿐이다. '투표권',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