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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마르둑 2016. 12. 17. 17:29




1905927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116번지에서 사백 석지기 양반집 육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면배와 두 형 이현기, 현석이 차례로 군북면 면장을 지냈다.

 

1910

822, 한일합병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

 

1920

2, 전북 무주군 무풍면 출신이 최문기와 결혼.

 

1921

금산 읍내 금산보통학교 사학년에 편입.

 

1923

전북 고창군의 사립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일학년 때 평균 91점으로 48명 중 일등, 이학년 2학년 때는 평균 85점으로 삼등을 하였다. 담임선생은 학적부 성격난에 침착하며 약간 집요한 데가 있다도 기록.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이면서도 한번 시작한 생각이나 일을 포기하지 않아 고집불통이라 불렸다. 큰딸 무영 출생.

 

1926

순종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610일 오전 여덟시 십오분,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맨 먼저 뛰쳐나가 만세를 불러 6.10반세운동에 불을 붙였다. 구속 육 개월 만인 1117일 기소유예로 석방되나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한다.

 

1927

4월에 중국 상하이로 밀항, 한인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해외운동의 분파성과 안일함에 회의를 느껴 삼 개월 만인 7월에 귀국, 금산 집에 머물며 금산청년동맹, 금산학우회, 금산학생친목회 등에서 활동한다. 외아들 극 출생.

 

1928

서울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 조선공산당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연맹에 가입, 학생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책임을 맡음. 학생과학연구회 서무부장을 맡는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제일고보 학생들을 조직하여 투쟁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음. 양정고보와 경신고보 동맹휴학을 지도.

활동 사 개월 만인 9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삼 개월만의 가혹한 고문 끝에 징역 4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됨. 감옥에서 이재유, 김삼룡 등을 만나 장차 노동운동을 함께 하기로 약속.

 

1932

11월에 만기 출소한 후 이듬해 1월 김삼룡, 이재유 등과 조선공산당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결성, 동대문과 용산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담담.

 

1933

경성트로이카 최고지도부의 일원으로서 동덕여고보,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학교, 숙명여고보, 경성제대 등 십여 개 학교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한편, 8월부터 9월까지 별표고무, 종연방직 등 여덟 개 공장의 연쇄파업을 지도. 12월에 체포되어 징역 사 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함흥형무소를 전전.

 

1934

둘재 딸 문영 출생

 

1938

6월에 만기 출소하여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정태식 등과 함께 조직재건에 나서 십여 개 공장에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는 한편, 12월에 화요회 계열의 지도자 박헌영을 영입해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콤그룹을 결성. 인민전선부와 선전부를 맡아 국내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

 

1940

10월에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폐병으로 건강 악화. 셋째 딸 상진 출생.

 

1942

10월 들어 이십 일간의 단식투쟁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병보석으로 석방됨. 삼 개월 후의 재수감을 거부하고 도주, 덕유산 단지봉 아래 암자에서 건강을 회복한 후 이주상과 함께 경상도 지역에 내려가 활동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자 대전으로 올라와 이관술, 김봉한 등과 활동, 가까운 금산과 대전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45815일 해방을 맞음.

 

1945

818일 명륜동 김해균 집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재건 모임에 참여.

919, 정식으로 통일재건 조선공산당이 출범되자 박헌영, 김삼룡, 김형선과 함께 조직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됨.

11,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회장에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축사.

12, 국군주비대 전국대회에서 인민의 군대가 되라는 내용의 연설.

 

1946

1123일 남조선 노동당 결성, 중앙위원으로서 노동부장에 선출굄. 얼마후 남로당 간부부장과 기관지 노력인민의 인사부장을 겸임함.

 

1947

27, 영등포 조선피혁에서 좌우익 노동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남로당 노동부장으로서 관여하다가 체포됨. 일제 아래 악명 높은 고문전문가이던 노덕술 등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두 달만에 불기소로 석방됨. ‘고문강자라는 별명이 붙음

625, 기관지 노력인민에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던 약산 김원봉에 대한 기고문을 게재하는 등 무력투쟁으로의 방향전환 시사.

7, 남로당 내에 군사부를 신설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함.

 

1948

3월 하순, 철원의 노동당 루트를 따라 28선을 넘어 월북.

414, 평양에서 열기로 한 남북연석회의에 남로당 대표로 참석.

5월부터 삼 개월간 해주의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훈련을 받음.

8월 초, 평양에 올라가 김일성과 면담한 후 이주하와 함께 남한으로 돌아옴.

1022,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남 여수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를 지도하기 위해 순천역에 도착, 반란 주동자들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아 본격적인 무장유격전 시작.

11월 중순, 육백여 명의 반군을 규합, 정식으로 지리산유격대를 결성하고 로명선이란 이름으로 사령관에 취임, 지리산 일대에서 군경과 충돌을 계속.

 

1949

1월 중순, 반란 주모자 지창수 체포, 부유한 가족들의 구명운동으로 사형을 면했으나 이듬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당함.

228, 남로당 문화부장 김태준이 인솔하는 시인 유진오 등 일곱 명의 문화공작대 조우. 문화공연을 하고 이틀 만에 귀경하던 공작대 전원 남원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함.

48, 한 달간의 삼일절 기념투쟁 중 거창에서 국군 대병령을 만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지리산으로 돌아오던 중 본부대 일행, 뱀사골 반선리에서 반공주민들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술 마시고 자다가 몰살됨. 김지회, 홍순석 등 본부대 지휘자 열일곱 명이 사망하고 이현상은 잔여 인원 백오십여 명을 이끌고 피아골 구례군당에 합류.

5, 남로당 지도부로부터 지리산에 인접한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의 다섯 개 지구당을 통합해 이현상이 위원장을 맡아 지도하라는 지령 도착, 이에 따라 구례군당 유격대 등을 통합해 삼백여 명 규모의 유격대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박종하를 참모장으로 함.

625, 평양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고 30일에는 조선노동당 창당. 김일성과 박헌영, 소련으로부터 남한의 유격투쟁을 기반으로 한 전면 남침 허가 요청함. 소련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공급받는 한편 팔백여 명의 유격대를 남파. 이현상의 지리산 부대는 제2병단으로 명명됨.

9월 들어 9,9투쟁에 총력, 수백 건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전투와 시설물 파괴 감행. 916일 광양에서 국군 15연대 기습, 육백여 명을 살상하고 칠백 명의 포로를 잡았다가 교육 후 방면함.

 

1950

1, 군경토벌대의 대대적인 동계 공세로 북한에서 내려온, 1, 3병단 괴멸과 함께 이현상의 제2병단도 큰 타격을 입음.

3, 서울의 남로당 지도부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이 체포되면서 지리산유격대 고립 심화.

6월 중순, 칠십여 명의 잔존 대원을 이끌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 시작. 연락 두절로 한국전쟁 발발 사실을 모르는 채 한 달여 전투를 계속하던 중 무주 근방에서 전쟁 발발 사실 확인.

7월 하순 무주에 진주해 인민군과 조우, 대전의 인민군 전선사령부로부터 낙동강전선을 넘어 대구 팔공산을 점거하고 유격투쟁을 하라는 지시를 받음.

81, 구십여 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낙동강을 도하, 두 달간 미군부대를 습격, 수백 명 이상을 사살하고 수많은 군수물자를 파괴하고 백 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다 풀어주는 등 대구 주변 미군 지역을 휩쓸고 다님.

10월 초,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선이 끊기면서 북으로 후퇴 시작. 인민군 낙오병, 인공 부역자 등 이천여 명의 피난민을 호위해 한 달 만에 북강원도 후평에 도착. 이승엽으로부터 남한 유격대 총지휘권을 받음.

1110, 팔백육십 명 대원으로 남부군 창설, 총사령으로 취임. 참모장 박종하, 정치위원 차일평 등을 선임, 15일 아침 남쪽으로 출발함.

12월 중순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남한 유격대를 6개 독립지대로 나누고 이현상을 제4지대장으로 임명하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으나 남부군에는 전달되지 못함.

 

1951

1월 중순, 소백산에 자리 잡고 이웃한 문경군과 단양군 도시들을 공격, 십 일간 죽령을 점거해 미군이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힘.

2월 미군 공습에 밀려 남하 중 세균전에 노출, 백여 명의 대원을 재귀열고 잃고 속리산에 들어감.

3월 속리산 남부 지역의 갈평 등 5개 산간 마을을 점거하고 주변 도시들을 공격, 삼 개월간 연전연승을 거둠.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 형무소의 좌익수 백사십이 명 석방시킴.

6월 초, 민주지산에 자리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의 군용열차를 습격함. 두 갈래로 나뉘어 남하하면서 덕유산 일대와 경상북도 내륙의 도시들을 기습, 막대한 피해 입힘.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한 유격대를 하나로 묶는 남부군 결성에 합의, 총사령관으로 취임함. 이 후 수개월간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남부군의 공격으로 군경이 막대한 피해를 입음.

814일 참모장 박종하, 가회전투 도중 사망.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감.

831, 노동당 중앙위원회, 남한을 5개 지구로 나누고 이현상을 전남과 전북, 충남과 경남 등 남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제5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하나 연락 두절로 일 년 후에야 지리산에 도착하게 됨.

11월 중순, 북한의 밀사가 도착, 195012월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내린 독립지대령을 전달, 이미 무효화된 명령에 따라 남부군을 해산하고 독립4지대로 재편성함.

11월 말, 군경토벌대의 제1차 동계 공세 시작됨. 중부전선에서 내려 온 국군3개 사단과 경찰 등 사만 병력이 지리산을 포위하고 한 번에 이 주일씩 세 차례에 걸쳐 총공격 강행.

 

1952

118, 대규모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 피난민 등 이천여 명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됨. 미군의 네이팜탄과 폭격으로 천 명 이상 죽거나 체포됨. 독립4지대도 한 달 전 사백 명이던 대원이 백오십 명으로 줄어듦.

81년 조선노동당 제94호 결정서 미 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하여가 남하 도중 체포되어 전향한 북한 연락원에 의해 도착됨. 이현상, 지리산 일대 남부 전역을 지도하는 제5지구당 위원장으로 취임. 명령서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상선연락대 보내나 속리산에서 전멸.

12월부터 군경토벌대 2차 동계 공세 시작, 삼 개월 간 제5지구당 산하 유격대 전체에 치명적 타격 입힘.

 

1953

3월 하순, 북한에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들에 대한 체포 시작. 일제시대부터 전향해 일본과 미국의 간첩으로서 남한의 혁명 역량을 고의로 파괴시킨 혐의로 조사 받음.

727, 미국과 북한 사이의 휴전협정이 타결, 산중의 도당 소속 당원들 하산 지시. 무장유격대원 일부도 하산 지시. 이현상, 자신이 아이를 임신한 간호요원 하수복을 하산시키나 화개장터에서 체포됨.

83, 이승엽 등 여덟 명의 남로당 지도부, 미제의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처형되고 연금 상태에 있던 박헌영도 정식으로 구속됨.

826, 5지구당 조직위원회 개최, 남로당의 종파주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자아비판 시작. 이현상, 미제 간첩 이승엽의 지령에 따라 남부군 결성하고 정규군식 부대 운영으로 대원들을 소모했으며 당 간부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하수복과 연애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음. 5지구당 해체되고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하산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짐. 수십 명의 직할 유격대도 도당 부대로 흡수, 분산됨.

9우러 18일 경찰 수색대, 오전 열한시 빗점골 합수내 옆에서 이현상의 시신 발견, 국군 수색대, 전날 저녁인 17일 밤 여덟시에 자신들이 사살했다고 주장.

이현상의 시신, 이십 일간 서울 창경원 등지에서 전시된 후 10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경찰토벌대장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짐.

 

1968(사후 15)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만들어진 가묘에 안장. 1호 열사증 추서 받음.

 

1990(사후 37)

8,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에 추서됨.




이 나라에도 '체 게바라'가 존재했었단다. 


남부군이라거나 지리산 빨갱이라거나 그 불리우는 이름은 진영 대결속에서 여전히 격렬하다.


지리산에 갈 때마다 그의 흔적을 뒤쫓아 보고싶은 호기심을 떨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현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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