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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의 판결)

마르둑 2016. 10. 1. 05:21

  피고는 전쟁기간 동안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가 기록된 역사에 있

어서 가장 큰 범죄라는 것을 인정했고, 또 피고가 거기서 한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자신이 결코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한

것이 결코 아니고, 누구를 죽일 어떠한 의도도 결코 갖지 않았으며,

결코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는 없었으며, 또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믿기가 어렵다

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동기와 양심의 문제에서 합당한 의심을 넘어

선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당신에 대한 증거는 비록 많지는 않지만

일부 존재합니다.

 

피고는 또한 최종 해결책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우연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할을 떠 맡았

을 수 있으며, 따라서 잠재적으로느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똑같이 유

죄라고 말했습니다. 피고가 말하려는 의도는 모든 사람, 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상당히 일반적인 결론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피고에 대

해 기꺼이 내주고 싶은 결론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피고가 우리의

거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두 이웃하는 도시

인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 주목해 볼 것을 권합니다. 이 두 도시

는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죄가 있었기 때문에 하늘로부

터 내려온 불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만 '집단적 죄'

라는 최신식 개념과는 무관합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그들 자신이 행

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그들이 참여하지도 않

았고 또 그로부터 이익을 얻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유죄로 추정한다

는 것, 또는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법 앞에

서의 유죄와 무죄는 객관적인 본질의 것이지만, 그러나 비록 8000만

독일인이 피고처럼 행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피고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운 좋게도 우리는 그만큼 멀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피고 자신은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주된 정치적 목적이 된 국가에서

산 모든 사람의 편에 서서 그 죄가 현실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잠재적

으로만 유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내적이고 외적인 어떠한 우연적 상황을 통해

피고가 범죄인이 되는 길로 내몰렸는지 간에, 피고

가 행한 일의 현실성과 다른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잠

재성 사이에는 협곡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피고가 한 일에

만 관여할 뿐, 피고의 내적 삶과 피고의 동기에서 가능한 비범죄적

본성 또는 피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범죄적 기능성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피고는 피고의 이야기를 불운에 찬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는 만일 상황이 보다 유리했더라면 피고는 우리 앞이나 또는 다른 형

사재판소로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는 점도 당신에게

인정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

고 가정을 해봅시다.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

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

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

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

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이들로서 각성을 요구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변명적이지만 스스로에겐 치명적인 논쟁에 열중이다. 

 

'정의' 란 과연 용서에 있는 것일까? 

한나는 아이히만의 케이스에서 만큼은 그것이

인류에 대한 범죄였건, 유대인에 대해서였건

오직 다른 종류의 허용여지가 없는 처벌로서 완성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쪽도 대어 주라는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원수를 돌로 쳐 죽이라는 그들의 믿음 속 메시아의 계시를 따르고,

로마의 입은 마리아와 예수의 사랑과 자비를 담고

소외받고 있는 곳을 찾아 죽어가는 아이의 이마에 축복을 기원한다.

 

폭탄을 숨긴 망토를 입은 채로 군중 사이로 뛰어든 영혼에겐

육신의 고통 따위는 차라리 영광스럽다.

 

서로를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손가락질을 해 대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기란

참 녹록치 않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인데,

아마도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게 답인가 싶으다.

 

날짐승이건, 물짐승이건, 땅짐승이건,

어디건 상관없다는 단목적 짐승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