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책

절망의 피안(옥중기5/5)

마르둑 2012. 10. 29. 17:33

나폴레옹의 새로운 통치는 전쟁의 앙양에 이어 문학과 예술의 앙양

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 위선적이고, 정숙한 척, 악랄하게 약올리는 도덕이란 무엇인가,

몽상가들의 이토록 고요한 영역에서조차도 음모자들을 만들어내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는 이 도덕이란 무엇인가?

이 같은 도덕은 마침내.,"차후로는 위안이 되는 책만을 쓰고, 인간

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착하고,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될 책만을 써야 한다" 라고 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리

라.

 

-----가증스런 위선이다!

 

(내 심문 조서의 요약과 고소당한 시편의 리스트를 참고할 것.)

 

                                                                   -Charles Baudelaire-

 

 

절망의 피안...(옥중기5/5)

 

우리에게는 저마다 다른 운명이 주어져 있다. 나의 운명은 공적인 불명예와 장시간의 수감, 비

참, 파멸, 굴욕, 이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 하여튼 아직은 그런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 하곤 했다고 기억한다. 나는 보랏빛 영구차가 나가거나 고귀한 슬픔을 가지고

비극이 찾아온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고, 또 근대에 들어와서 가장 가공할 만한 사실은 비극에

희극의 옷을 입혀 위대한 현실을 아주 평범한 것이나 괴이한 것, 혹은 형식을 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근대에 있어서 그것은 사실이다. 또 그것은 실제의 생활에 있어서도 진실이었을 것이다.

순교가 바보짓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말해 19세기도 결코 이러한 법칙의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비극에 따르는 모든 것은 기분 나쁘고 천박하며 또 몸서리나며 품위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의복까지도 우리를 괴이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슬픔의 익살꾼이었다. 우리는 가슴에 상처를 입은

어릿광대였다. 우리는 실로 웃기게 만들어졌다.

 

1985년 11월 13일, 나는 런던으로부터 이곳에 송치되었다. 그날 나는 그때부터 2시 30분까지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채 뭇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클래펌정션의 플랫폼 한가운데 서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병실로부터 끌려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괴상망측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연방 웃어 댔다.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구경꾼이 더

욱 늘어났다. 그들의 흥겨워하는 모습이 실로 나에게도 가관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그들은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몰랐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한층 더 웃어 댔다. 나는 거의 반

시간동안이나 회색빛 11월의 빗줄기 속에서 비웃고 있는 군중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런 일을 당하고 난 후 거의 1년동안 나는 매일 그와 비슷한 시각에, 그와 비슷한 시간 동안 울며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정도는 듣기보다 그렇게 비극적인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옥 속에 있는 사람에게

눈물은 그야말로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울지 않는 날이란 마음이 즐거운 날이 아니라 마음이 완전히 굳어버린 날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나 자신보다 나를 비웃었던 사람들을 훨씬 더 불쌍하게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월계관이 아니라 칼을 쓰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대(臺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은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그런 높은 대라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

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형틀은 무서운 현실이다. 그들은 슬픔을 보다 깊게 이해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슬픔은 그 이면에도 항상 슬픔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슬픔 뒤에는 항상 하나의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처럼 고뇌하고 있는 영혼을 비웃는다는 것은

너무나 지독한 일인 것이다.

 

내가 여기로 송치될 때의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는 이유는, 고통과 절망뿐인 나의 형벌로부터 다른

무엇을 얻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이해해 주기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러자면 때때로 순종과 감수의 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봄은 하나의 새싹 속에 모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며, 땅 위에 지어 놓은 종달새의 둥지는 수많은

장미빛의 붉은 새벽의 도래를 예고하는 환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굴복과 자기 비하와 겸손의 순

간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수하고 또 감수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견제함

으로써 나 자신의 향상을 위한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어떤 절친한 친구(그는 나와 10여년이나 사귀어 왔었다)가 찾아와서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은 한 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무고한 자로 또 엄청난 음모의 희생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아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나에 대한 그 비난 속에는 전혀 근거도 없고 악의

어린 반감에 의한 것이 많긴 하지만 나 자신의 삶도 분명 거짓된 쾌락에 넘쳤으므로, 당신이 만약

나의 이러한 사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친구도 될 수 없고 당신의 동료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에게 무서운 충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친구이다. 하지만 내가 위선에 의해서 그

의 우정을 살려 온 것은 아니다.......

 

                                                                                                                        -O.wilde-